할 일 목록 맨 위에 있는 항목은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대신 그 아래 있는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며 하루를 보내고 나서야, 사실 오늘도 꽤 많은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스탠퍼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 존 페리는 이 현상에 ‘구조화된 미루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미루는 습관을 없애는 대신 거꾸로 이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철학 교수가 써 내려간 미루기 변론
페리는 1995년 4월, 정작 채점해야 할 시험지와 작성해야 할 교재 주문서, 심사해야 할 연구비 제안서, 읽어야 할 박사논문 초고를 미루면서 이 글을 썼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는 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더 중요한 일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이 글은 이듬해인 1996년 2월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실렸고, 이후 ‘구조화된 미루기(Structured Procrastination)’라는 제목으로 다시 소개되며 더 널리 알려졌다.
페리가 관찰한 것은 미루는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목록 맨 위의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 대신, 그보다 급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쓸모 있는 다른 일을 처리한다. 페리는 이 성향을 없애려 애쓰는 대신, 할 일 목록의 순서를 짜는 데 그대로 활용하라고 제안했다.
페리는 스탠퍼드에서 논리학과 언어철학을 가르치던 학자였고, 이 글 역시 정식 논문이 아니라 동료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짧은 글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든 예시가 워낙 구체적이고 공감이 가는 내용이어서, 이 글은 학교 안팎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풍자로 시작해 상을 받기까지
이 글은 원래 진지한 논문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가벼운 농담에 가까웠다. 그런데 2011년, 페리는 이 이론으로 이그노벨상 문학 부문을 받았다. 이그노벨상은 처음에는 웃게 하고 그다음에는 생각하게 만드는 연구나 글에 주는 상이다. 이후 페리는 이 아이디어를 확장해 2012년 『The Art of Procrastination』을 펴냈고, 국내에는 『미루기의 기술』로 번역 출간되었다. 넷스케이프 공동창업자 마크 안드리센이 이 글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일화도 여러 매체에서 소개되었다.
다만 페리의 제안이 모든 형태의 미루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심리학 쪽에서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미루기를 의지 부족보다는 정서 조절의 문제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이나 불편한 감정을 피하려는 반응이 쌓이면서 미루기가 굳어진다는 설명이다. 페리가 말한 구조화된 미루기는 이런 회피 패턴을 다루는 방법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할 일이 쌓였을 때 순서를 재배치해 실질적인 성과를 끌어내는 기법으로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목록의 맨 위에 무엇을 놓을 것인가
방법은 단순하다. 할 일 목록을 만들 때, 당장 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지만 그럴듯하게 중요해 보이는 일 하나를 맨 위에 올려놓는다. 그 아래에는 실제로 오늘 처리하고 싶은 일들을 순서대로 적는다. 맨 위의 일을 피하려는 마음이 나머지 일들을 처리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맨 위의 일이 실제로 마감에 몰리면, 그때는 다른 새 항목으로 바꿔 놓으면 된다.
예를 들어 ‘부서 업무 프로세스 개선안 작성’처럼 크고 막연한 일을 목록 맨 위에 적어두면, 그 아래 있는 이메일 회신이나 회의 자료 정리, 밀린 결재 서류 처리 같은 일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급하게 느껴진다. 결과적으로 그날 손댄 일의 개수는 늘어나고, 맨 위의 일은 정말로 마감이 닥쳤을 때 처리하거나 더 잘게 쪼개 목록 아래로 내리면 된다.
이 방법이 오래 작동하려면 맨 위에 놓는 일이 그럴듯하게 중요하면서도 마감은 유연해야 한다. 지나치게 시급한 일을 올려두면 결국 그 일부터 처리하게 되어 순서가 무너지고, 반대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올려두면 피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생기지 않아 효과가 사라진다.
결국 구조화된 미루기는 미루는 성향을 없애려 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한 채로 하루의 성과를 늘리는 재배열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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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ohn Perry, “Structured Procrastination” (essay, 1995년 4월 작성, 1996년 2월 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게재), jblevins.org 재게재본
- Stanford Daily, “Philosophy prof wins Ig Nobel prize for ‘structured procrastination’” (2011.10.04)
- Verke, “미루기: 왜 미루게 되고, 무엇이 도움이 될까”
자주 묻는 질문
구조화된 미루기는 누가 처음 제안했나요?
스탠퍼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 존 페리가 1995년에 쓴 에세이에서 처음 제안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로 2011년 이그노벨상 문학 부문을 받았습니다.
만성적으로 일을 미루는 습관도 이 방법으로 해결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페리가 제안한 것은 할 일 목록의 순서를 재배치하는 실용적인 기법이며, 불안 등에서 비롯되는 반복적인 회피 패턴을 다루는 방법은 아닙니다.
목록 맨 위에는 어떤 일을 올려야 하나요?
중요해 보이지만 마감이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을 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급한 일을 올리면 결국 그 일부터 처리하게 되어 방법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